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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헌의 독서파크(66)] '부의 도시 베네치아'서울패미리병원 해헌(海軒) 강일송 병원장
양산뉴스파크 | 승인2021.10.04 12:38
 로저 크롤리 저자의 '부의 도시 베네치아'.(사진제공=해헌 강일송)

 오늘의 내용은 베네치아에 대한 글이다. 베네치아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 가장 거대한 부를 일구어 낸 도시국가이다. 

 자본주의가 시작되기도 전, 가장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내었고, 종교와 이념 등을 초월해 오직 무역에 초점을 맞춘다.

 훗날 외교의 본가임을 자부하는 영국마저 "현대외교는 13세기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베네치아의 외교술은 탁월했다.

 이번 주제는 베네치아 이야기 중,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에 관한 내용을 풀어서 옮겨 본다. <해헌(海軒) 주>

 [시작하며]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 위의 바다는 진기한 청록색이다.

 북쪽 멀리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내려온 엄청난 양의 충적토가 쌓여 석호와 습지를 형성한다. 여기가 '베네치아만(灣)'이다.

 수 천년 동안 이 곳은 중부유럽과 동부 지중해 지역을 연결하는 해양 고속도로였으며, 세계 무역의 관문이었다.

 베네치아는 습지에서 마술처럼 존재하는 도시였다. 진흙 속에 박아놓은 오크나무 말뚝 위에 위태롭게 건물을 세우고 존재했다.  

 석호에서 나는 숭어와 장어, 그리고 염전 외에는 베네치아가 생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베네치아의 유일한 기술은 항해와 화물 수송이었다. 여기서 선박의 질은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들의 사회구조는 토지가 없으므로 봉건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기사와 농노간의 구분도 분명하지 않았다.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모든 국민들이 단결했고 애국적인 연대를 이루어 행동했다. 그들은 육지와 바다, 동방과 서방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비잔틴 세계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종속되었고 비잔틴 예술과 의식절차, 상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동시에 라틴 가톨릭 교도들이었으며, 교황에 복속했다. 그처럼 대립하는 두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은 특별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투쟁했다.

 베네치아인들은 누차 교황에게 저항했으며, 교황은 도시전체를 파문하기도 했다. 그들은 정부의 독재적인 조치에 항거했으며, 스스로 공화국을 건설하여 '도제(doge)'가 이끌게 했다.

 비잔티움과 베네치아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도 오래된 것이었다. 서로 간 다른 세계관으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했지만, 베네치아는 항상 콘스탄티노플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대도시였으며, 동방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도시에는 세계의 부(富)가 차고 넘쳤다.

 1080년 베네치아인들은 아드리아해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던 강하고 호전적인 노르만족으로부터 비잔틴 제국을 방어했다.

 그들은 엄청난 보상을 받았는데, 비잔티움 영토 내에서 세금도 내지 않고 자유롭게 교역할 권리를 허용한 것이다.

 또한 베네치아인들은 비잔틴 및 십자군으로 이루어진 편과 그 적인 이집트 파티마 왕조사이에서 늘 민첩하게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1198년 여름, 로마교황은 새로운 십자군을 소집했다. 4차 십자군이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37세의 젊고, 총명하고, 결의에 찬 인물이었다.

 그의 십자군 소집은 군사적 모험인 동시에 세속화 되어가는 세상의 도덕을 재무장하는 운동이었으며, 교황의 권위를 재확립하려는 일종의 주도권 행사였다.

 군사전략가들은 지난 1세기 동안 십자군 운동을 하면서 육로를 통해서 시리아로 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또 하나는 비잔틴인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무장 병력이 지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베네치아만이 십자군 전체를 바다를 통해 동방으로 실어 나를 능력과 자원,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때, 베네치아의 지도자 도제는 엔리코 단돌로였다. 그는 이미 90세가 넘었고 눈도 멀었지만, 무수한 경험으로 그는 지혜롭고 현명하였다.

 십자군 남작들은 베네치아를 방문해 계약을 성사시켰는데, 4,500명의 기사들과 2만명의 보병, 4,500마리의 말을 실어 나를 다양한 형태의 선박을 베네치아가 공급하기로 했다.

 거기다가 사람과 말들이 9개월 동안 먹을 식량이 포함되었고, 총 비용은 9만4,000마르크였다. 이는 엄청난 액수로, 프랑스의 1년치 수입과 맞먹었다.

 베네치아인들은 뼛속까지 상인들이었고, 계약하는 일이 본업이었다. 정복하는 것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조건으로, 50척의 무장 갤리선들을 무상으로 추가 공급하였다.

 하지만 십자군의 처음부터 인원을 너무 무리하게 책정하였고, 시작부터 재정적 압박에 시달렸다.

 교황은 세금을 거두어서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베네치아는 전체 인구가 모든 상업활동을 중단하고 13개월 만에 이 모든 선박을 건조하여야 했다.

 450척의 선박과 무상으로 제공할 50척의 갤리선 말이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십자군들은 베네치아로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계약내용과 실제 군사 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단지 1만2,000명만이 집결을 한 것이다. 문제는 십자군들이 베네치아에 지불할 돈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고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의 빚을 탕감해줄 수 없었다.

 도제 단돌로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십자군 고위 지휘부에 놀랄 만한 제의를 한다.

 부유한 도시지만 베네치아의 통제에 저항을 하던 달마티안의 해안도시 '자라'를 진압하는 것을 십자군이 도와주면, 채무상환을 유예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자라가 기독교 도시라서, 신학적으로 십자군은 곤란에 빠지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또 다른 십자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은 진퇴양난에 빠져있었다. 자라를 공격하든지, 아니면 해체가 되어야 했다.

 자라를 공격한다면 파문한다는 교황의 서신에도 불구하고, 단돌로는 십자군 지휘부를 이끌고 자라를 공격한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도시를 약탈했지만 아직도 3만4,000마르크의 빚이 남아 있었다.

 1203년 비잔틴의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라는 젊은 귀족의 제안이 도착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전(前) 황제 이사키우스 였고 삼촌이 왕위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를 도와서 황제에 옹립시키면 엄청난 금액의 보수로 십자군의 채무를 변제할 수 있을 것이고, 비잔티움의 정교회가 로마에 복종하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성지로 가는 두 번째 길목에서 또 다른 기독교 도시를 공격을 해야 하는 것이고, 인노켄티우스 교황이 대노할 것이 분명하였다.  

 자금이 없고, 부채도 미해결된 상태여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휘부 간부회의에서 표결이 이루어졌고 십자군은 노회한 단돌로의 이끌림에 또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된다.

 1203년 6월 23일,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바다쪽 성벽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엄청난 규모의 베네치아 함대가 1만명의 십자군을 태우고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비잔틴 제국은 해군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난 800년가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3중 성벽요새를 믿었다. 그리고 3만명의 육군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도시를 잘 아는 베네치아의 갤리선들은 가교와 투석기를 이용해 공격해 들어간다. 800년간 진입을 허락지 않았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지고, 인구 50만의 세계최대 도시는 베네치아와 십자군의 발아래 놓이게 된다.

 [마치며]

 오늘은 베네치아 이야기를 한 번 해보았다.

 베네치아인은 6세기 경, 훈족의 침략을 피해 바다 안까지 들어가서 진흙뻘에 통나무를 길게 박아서,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던 그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뿌리 깊은 상인정신으로 세계 최고의 부를 일구어 낸다.

 기독교 국가지만 이슬람과도 무역을 하고, 심지어 몽골제국과도 교류를 한다. 주변 도시국가들과 경쟁을 하면서 발전해가는데 이념이나 신앙보다 실용과 이익에 첨예하게 민감함을 보여준다.

 수세기를 앞서서, 수요공급법칙, 안정적인 통화, 합리적인 법과 세금제도 등을 시행했다고 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익에 민감한 경제관념의 베네치아가, 명분과 신앙의 발로로 시작한 십자군을 어떻게 같은 기독교 도시, 자라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끔 하는 지에 대해 나온다.

 마치 최근의 국경없이 무자비하게 전 세계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현대의 투자자본을 보는 듯하다. 이익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찾아간다.

 하지만 어떤 나라든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라, 그동안 서유럽과 비잔티움, 이슬람 사이에서 무역을 독점하던 베네치아도 오스만투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장악하고 나서 하락길로 들어선다.

 거기다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우회하는 대항로를 발견한 후 중계 무역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베네치아를 보면, 스스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여 눈부신 발전을 한 모범적인 국가라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물불 안가리고 이익을 추구한 비모범적인 국가라는 생각도 함께 든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관광명소로서 이름이 드높은 베네치아.

 한 번 이 책을 읽어보시길 권유드린다.

 <강사소개>

 해헌(海軒) 강일송

 현 양산 물금증산의 양산세무서 6층과 7층 서울패미리병원의 병원장,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한림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최고지도자 과정(AFP) 수료.

 <저서> ▶우리아이 성조숙증 거뜬히 이겨내기, ▶우리아이 변비와 야뇨증 거뜬히 이겨내기, ▶초보 육아 거뜬히 이겨내기, ▶더바이블 육아 소아과 수업 3권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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